본문 바로가기
꺼지라고 말할 용기

욱하는 상사의 멱살 잡아끌기

by ellev 2022. 10. 10.

뭐든 10년 하면 '짬바'가 생긴다.

나의 짬바이자 자타공인 업무 강점은 바로 멱살 잡아끌기일 것이다. 내 커리어 전반에서 반짝이는 업적을 세운 시기에는 항상 이 멱살잡이가 잘 되었을 때였다. 석사과정에서도 마찬가지였는데, 이 멱살잡이가 없었다면 난 절대 제때에 맞춰 졸업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아 죄송해요. 너무 바빠서 안 들렸습니다.

 

 

 

나의 첫 멱살잡이

오래전 다닌 회사에 아주 까다롭고 성질도 고약해서 모두가 어려워하던 욱 부장이 있었다. 어느 날 파트장이 나에게 와서 말했다.

 

"넌 쟤를 아주 잘 다루는 것 같다. 비법이 뭐냐?"

 

처음에는 뭔 소린가 했다. 나는 사원이고 상대는 부장인데 누가 누굴 다룬단 말인가.

 

목줄을 확인해 보세요. (도비가 노예라는 뜻이에요)

 

 

 

 

딱히 그 고약한 욱부장을 뭔가 특별하게 다룬 적도 없고 그가 쉬운 상대라고 생각한 적은 더더군다나 없었다. 그런데도 파트장을 포함해 내 동료들도 내가 그 상사를 '잘 다루고' 있다고 평가했다.

이유가 뭘까?

 

 

욱부장은 다혈질이었다.

성격이 급해 심심하면 다짜고짜 상대에게 내선번호로 직통 전화를 걸어 소리를 지르고는 했다. (요즘 같으면 큰일 날 일이지만 몇 년 전만 해도 이런 상사들이 왕왕 있었다.)

나도 사람인데 처음 욱 부장이 고함을 질렀을 때는 당황했었다. 당연히 기분도 나빴다.

 

그래서 전화를 끊어버렸다

사실 너무 당황해서 끊어버렸다. 그리고는 욱부장의 사무실로 성큼성큼 걸어가 문을 열었다. 아직 한 손에 전화기를 든 채로 눈을 꿈뻑 거리는 욱부장에게 말했다.

 

"전화기 고장인지 데시벨이 넘어가면 지지직 거리더라고요. 대체 알아들을 수가 없어서요."

(꿈뻑..꿈뻑)

 

"무슨일로 전화하셨어요?"

"아니.. 여기 보면 서치 기능 말이야... 이건 여기 안 넣기로 했는데.. 당장 수정해야 되는데.."

 

 

이때 나는 '이 시키가 방금 나에게 소릴 질렀어!' 하는 건 머릿속에서 최대한 지우고 욱부장의 입에서 나오는 업무 관련 내용만 집중했다. 무표정이었지만 속으로는 난리부르스를 추고 있었다. '왜 전화 끊은거 뭐라 안하지? 전화 끊는다고 뭐라하면 뭐라 변명하지?'하는 상념들이 삭삭 지나갔다.

 

'전화 끊었다고 뭐라하면 넌 왜 소리 지르냐고 뭐라하지 뭐.'

'아니면 큰 소리에 트라우마가 있어서 전화기를 놓쳤다고 할까?'

 

에라 모르겠다. 어차피 이미 질러버린 후이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돌+아이 빙의를 한 후 눈을 크게 뜨고, 아주 환하게 웃으며 답했다

 

"아, 이거요? 금방 되니까 바로 수정할게요!"

 

'네놈이 어제 시킨 대로 한 수정사항을 또 수정하라고 시킨 것에 대해' 자꾸 떠올라 입에서 간질간질했지만 애써 박박 지우고 말했다.

 

좀비 속에서 살아남으려면 좀비인 척! 돌아이 속에서 살아남으려면 가끔은 돌아이인척 하자.

 

 

욱부장의 반응은?

욱하는 성질머리는 있었지만 욱부장이라고 영 구제불능의 인성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 후로 욱부장은 전화로 소리를 지르다가도 내가 전화를 끊은 뒤 쳐들어가면 차분해진 자세로 업무지시를 했다. 이 과정이 몇 번 반복되자 그 후 나에게만은 한 번도 소리를 지르지 않았다.

 

 

(강아지 입질 훈련을 했던 경험이 도움이 되었다. 오해하진 말자. 절대 욱부장이 '개'같다는 것은 아니다.)

 

 

욱부장을 상대하면서 얼굴을 붉히거나  뒤에서 씩씩 대며 '미친놈! 죽일 놈!'하지 않다 보니 주변에서 보기에 내가 욱부장을 '잘 다루는'것처럼 보였던 것 같다. (물론 첫날은 너무 열받은 나머지 집에 가서 울었다)

게다가 놀랍게도 욱부장이 내가 일을 아주 잘한다며 칭찬하고 다녔다고 한다. (변태냐?)

 

 

십 년이 지난 지금도 욱부장은 손에 꼽히는 최악의 상사 중 하나이다. 나에겐 맞춰야 할 프로젝트 데드라인이 있었고 욱부장이 결재라인에 있었기 때문에 지시사항을 전달받고 프로젝트를 넘기고 난 월급을 받으면 된다는 주의로 회사를 다녔다. (그 땐 그만둘 수 없는 사정이 있어 버텼지만 요즘 같으면 당장 그만뒀을 거다.)

 

그 후로 나에게는 단 한번도 소리 지르지 않았고 욱부장이 업무지시와 일처리를 깔끔하고 명쾌하게 해 줬기 때문에 제법 "일로는" 팀워크가 잘 맞게 되었다.

 

 

이 '멱살 끌기'는 기선제압도 아니고 기싸움도 아니다.

내 경험상 조직에서 기싸움은 에너지 낭비이다. '멱살 끌기'라는 다소 과격한 표현을 썼지만 내 나름의 생존 비결인 셈이다. 

 

협업하기 까다로운 사람과 (비교적) 원만하게 일하며
내게 필요한 것을 찾는 나만의 방법, 즉 '짬바'라고 할 수 있겠다.

 

이래저래 해도 안 되는 상또라이라면 상종하지 않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당신의 자존감과 정신건강을 위해 그런 회사는 다니지 마세요.

 

<다음 편: 대학원생이 지도 교수의 멱살 잡아끌기>

 

 

 


한 번씩 나의 글 유입 키워드 중 '직장에서 실수했을 때' 등 사회 초년생들의 고민 키워드가 보이면 마음이 안타깝다. 얼마나 속상할지, 얼마나 울며 스트레스로 밤잠을 설칠지, 얼마나 회사 가기 괴로울지, 나도 겪어봤기 때문에 마음이 쓰였다.

 

10년이 지나면 누구나 자신의 분야에서 크고 작은 '짬바'가 생긴다.

그렇기 때문에 선배나 주변에 물어보면 더 빠르고 실질적인 도움을 줄텐데도 혼자 인터넷으로 찾아보는 이유가 무엇일지 궁금하기도 하다. 아마 당장의 업무 훈련에 급급해 직장에서 인간관계에 대한 '노하우'를 사소하게 여겨 신입들에게 공유가 잘 안 되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기회가 되는 대로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만한 '짬바' 에피소드를 공유해 보려고 한다.

728x90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