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일을 저질렀다.
정확하게는 약 10개월 전에 저지른 일이 이제 내 앞에 나타났다.
제이는 옆에서 실내자전거를 타고 있었고 나는 먼지를 잘 먹어 끔찍이도 싫어하는 융단 같은 천으로 만들어진 IKEA 의자(제이가 저렴하지도 않은 이걸 덥석 사 왔는데 앉을 때마다 속으로 욕하고 있다)에 앉아 핸드폰을 보고 있었다.

앱 알람 확인을 귀찮아하는 편인지라 어떤 앱은 빨간 동그라미 숫자가 72인 것도 있었다. 하나씩 해치우다 이메일 앱을 열었다.
기다리는 소식이 있어 하루에 몇번씩 이메일 앱을 들락거렸었는데 오지 않는 소식에 지쳐 '에라이'하고 일부러 이메일을 확인하지 않은지 일주일 정도 지났을 때였다. 무심코 이메일 앱을 열어 받은 편지함을 들락거리고 있는데 뭔가 탁! 걸리는 메일 한 통이 있었다.
'스팸인가?' 생각하면서 열었는데 첫 줄에 쓰여있는 'Congratulation!'. 그대로 굳어서 뻣뻣한 고개를 끼릭끼릭 돌려 제이에게 말했다.
"...어...나... 합격했나 봐...?"
"뭐? 뭐? 어딜? 뭐가?"
제이가 내 손에서 핸드폰을 가져가 이메일을 읽었다. 그러더니 제이도 고장이 났다.
"어..? 어? 진짠가본데? 너 붙었나 본데?"
"그런 거야? 맞아? 스팸 아니야?"
".. 에이.. 설마."
"어? 뭐야, 너도 스팸 의심되는구나?"
그 후로 노트북을 가져와서 큰 화면으로 다시 읽어보고서야 정말 합격통지서라는 걸 깨달았다.
"와아!!!!!!!"
"우와!!!!!!"
"아! 깜짝이야!" (딸 놀람)
그제야 실감이 훅 밀려와 우리 둘은 손을 마주 잡고 붕붕 흔들다가 (아파트라 뛰지 못했다..) 딸내미까지 일으켜 세워 우리 셋은 발은 살금살금 맞잡은 손은 커다랗게 붕붕거리는 웃긴 강강술래를 하며 거실을 뱅뱅 돌았다.

1년 전 저지른 씨앗에서 기적이 일어났다.
사실 우리는 코로나 전, 영어권 국가를 상대로 닥치는 대로 박사 유학을 시도하고 있었다. 호주, 캐나다, 뉴질랜드, 싱가포르 등이었는데 미국을 제외한 이유는 생활비 감당이 안 될 거라는 판단에서였다. 준비를 착착해가고 있는데 코로나 놈이 터졌다.
모든 것을 취소하고 에이전시에 위약금을 환불받고 다음 해에 다시 도전하기로 했다. 돈도 더 모으고 서류도 더 준비해야지 했던 초반과는 달리 '일단 살아남는 게 목표'가 되어버려 매일 그냥저냥 버티며 살았다.
그러나 점점 상황이 악화되기만 해서 학교와 학원이 문을 닫고, 하원 도우미님이 갑자기 못 오는 날도 있고 하다 보니 매일 불안에 시달렸다. 육아 공백에 대한 불안감으로 회의실에서 과호흡도 겪다가 결국 일을 그만두고 육아에 전념할 수밖에 없었다.
하도 불행은 연속으로 오고 행복은 소소하기만 해서
'아이고, 내 팔자' 그냥 이런가 보다 하고 살면 마음 편하려나 하는 생각도 해봤다.
왠지 나는 뭐든 안될 것 같았고, 말도 안 되는 일이라 생각했다. 지질하다 해도 좋고 패배주의에 자기 비하거나 자기 합리화라고 해도 좋다.
그렇게 1년이 지났다. 그동안 이거 저거 시도는 해봤는데 이렇다 성과가 없었다. (그래, 다 망했다.)
2021년이 되어 이제나 저제나 코로나가 좀 잠잠해지면 다시 육아 돌봄 해줄 사람을 찾고 복직해야지.. 하고 있는데 제이가 말했다.
"박사 유학 준비 다시 해 보는 거 어때?"
".... 음.. 그래. 그러지 뭐."
그렇게 2021년 봄, 나는 수험생이 되었다.
처음에는 미국은 알아보지도 않았었다. 나는 흙수저니까.
미국 대학을 피하려던 이유는 또 있었다. 그놈의 지랄 맞은 GRE 시험... (사실 이게 80% 이유) 박사 지원하면서 아이러니하지만 난 공부를 싫어한다. 영어공부도 정말 하기 싫어서 질질 울면서 했다. (월급은 좋지만 일하기는 싫다. 하지만 월급을 받기 위해 싫어하는 일을 하는 것과 비슷하다.)
'에라 모르겠다~'
그러다 어느 날 머리에서 핑- 하고 뭐가 날아갔나 보다. 한국을 포함해 온갖 대학들을 알아보다 일을 저질렀다.
내 사고 패턴이 좀 이런 식이다. 처음에는 이것저것 재고 따지고 하다가 나중에는 '에라, 모르겠다. 받아 주는 곳이면 아무 데나 가자.'라는 생각으로 미국 대학들도 지원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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